1. 고대 그리스 로마 저술가들의 연구는 메카가 기원후 4세기 이전에 건설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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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Dr. Rafat Amari
메카의 진정한 역사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원하는 독자는 Amari박사의 책 “Islam in light of History”를 참조할 것을 권한다.
그리스 지리학의 정확한 자료는 기원후 4세기 이전에 메카의 존재를 부정한다.
어떠한 그리스 로마 저작자 또는 지리학자의 저작물에서도 메카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 사실은 메카가 아브라함 시대 이후로 존재하였다는 이슬람의 주장에 대한 중요한 논점이다. 우리는 기원전 4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까지 아라비아를 방문한 많은 지리학자들과 그리스 로마 저작자들의 완벽한 기록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의 일부는 아라비아에 존재하는 모든 도시, 마을, 부족, 사원에 관하여 우리에게 말해주는 지도를 그렸지만 메카에 대한 언급은 없다. 메카가 이러한 지리학자나 저작자들의 시대에 정말로 존재하였다면 분명히 누군가는 이 도시에 관하여 우리에게 말하였을 것이다.
여러분들의 더 빠른 이해를 위하여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 로마 저작자들 가운데 일부의 저작물을 살펴볼 것이다. 그들은 상인들이 제공한 보고에는 많은 참고를 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것을 기원전 64년에서 기원후 23년 사이에 살았던 그리스의 유명한 지리학자이며 역사가 스트라보(Strabo)의 저작물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상인들의 기록에 의존하지 않고 그 지역을 직접 방문한 지리학자들과 역사가들의 기록에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다.[i] 이것은 고대 그리스 지리학자들과 역사가들에 의하여 제공되는 아라비아의 지리학에 관한 연구를 가치 있는 자료로 만들며 특히 그들이 기원전 5세기 말에서 기원후 4세기까지 서부 아라비아에 존재하였던 도시들을 말할 때이다.
이어서 그리스 지리학자들과 역사가들에 의하여 수집된 사실들은 이러한 도시들이 처음 나타났을 때의 데이터를 수립하는데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이러한 지리학자들이 기원전 5세기 말에서 기원후 3세기 사이에 생성된 정확한 자료를 우리에게 제공하였고, 학자들은 서부 아라비아에 건설된 각 도시의 연대를 거의 20년 오차범위로 쉽사리 결정할 수 있다. 신뢰할 만한 정확함으로 우리는 메카가 그리스 로마 지리학자들에 의하여 기록된 모든 연도에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 당시를 기록하였던 역사가들과 지리학자들에 의하여 언급된 적이 없음에도 메카와 같은 도시가 무슬림들이 주장하는 대로 그렇게 일찍부터 존재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따라서 아브라함의 시대부터 메카가 도시로 존재하였다는 주장은 명분이 없다. 그것은 누군가가 주장하거나 역사에 엮어 넣은 가장 비역사적인 주장이다.
알렉산더 대제의 지리학자들과 아라비아
알렉산더는 바빌론에서 해양탐험대를 세 차례 보냈다. 첫 원정대 대장은 아르키아스(Archias)였는데 그는 Tylus(바레인)섬까지 갔다(Arrian, Anabasis, book vii, chapter 20:6 and 7). 알렉산더는 이어서 또 다른 해양탐험대를 안드로스테네스(Androsthenes)를 대장으로 하여 보냈고 그는 아라비아 반도 일부분까지 항해하였다. 알렉산더가 보낸 세 번째 탐험대는 솔리(Soli)의 히에론(Hieron)이 대장이었다. 아르리언(Arrian)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히에론은 이집트 근처의 히어로폴리스(Heroopolis)를 마주하는 페르시아만까지 아라비아 반도 전체를 항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아라비아의 대부분을 두루 항해하였지만 더 이상 가지 않았고 바빌론으로 돌아왔다( Arrian, Anabasis, book vii, chapter 20: 7, 8). 히에론이 아라비아의 대부분을 두루 항해하였다는 것은 그가 아라비아 서부를 항해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돌아왔다. 히어로폴리스 맞은 편 이집트만에 도달하기 전에 히에론이 돌아온 이유는 서부 아라비아 중부의 건조한 기후 때문이었을 것으로 우리는 추측한다.
거기에는 그의 함대가 정박할 항구도, 도시도, 주민도 없었다. 이것은 나중에 그리스 지리학자들이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것으로 기술한 지역이며 나중에 메카가 건설된 아라비아 서부의 일부와 일치한다. 알렉산더가 아직 이집트에 있는 동안 보냈던 이전의 탐험은 아주 중요하다. 그는 서부 아라비아를 탐험하기 위하여 이집트의 도시 히어로폴리스에서 아낙시크라테스(Anaxicrates)를 보냈다. 학자들은 아낙시크라테스의 탐험은 아주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 히만수 프라브하 레이(Himanshu Prabha Ray)박사는 기록하였다, “아낙시크라테스는 밥-알-만뎁(Bab-al-Mandeb)까지 아라비아 서부해안 전체를 항해하였다”(The archaeology of seafaring in ancient South Asia, Press of the University of Cambridge, 2003, page 170). 고대 아라비아 지리학에 있어서 전문가 스텐리 버스테인(Stanley Burstein)박사는 아낙시크라테스가 서부 아라비아에서 정치적 상황에 관한 정확한 내용을 제공하였다고 말하였다(Burstein , Agatharchides of Cnidus, On The Erythraean Sea, The Hakluyt Society, London, 1989, page 3). 이것은 아낙시크라테스가 아라비아 서부지역을 지배하였던 국가, 도시, 부족에 관하여 정확한 내용을 제공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거기에 메카에 관한 언급은 없다.
꾸란의 역사적 주장들과 성경의 역사적 주장들을 비교하면 성경의 주장들이 진실하며 역사적으로 정확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대조적으로, 예루살렘이 존재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의 핵심적 중요성을 논쟁하는 비판자는 역사에서 한 명도 찾을 수 없다. 예루살렘과 그것의 유일신 신앙에 관한 기록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기원전 15세기에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후로 각 세대를 이어서 전하여졌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집트까지 모든 기록들은 예루살렘에 관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는 히브리 문서에서 예루살렘시를 통치하였던 왕들에 관한 완전한 기록들을 발견한다. 내부적 외부적 기록들에 의하여 입증되는 많은 문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대인들에 의한 유일신 예배에 관하여 말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무슬림 친구들이 성경에서 선포되고 기록된 역사를 통하여 알려진 유일신 예배의 역사적 유산으로 돌아오고 기원후 5세기에 지어진 다신교 사원에서 어떠한 역사적 근거도 없이 만들어진 예배를 주장하는 것에 관심을 주지 않도록 확신시킨다.
데오프라스토스(THEOPHRASTOS)의 조사
데오프라스토스(Theophrastos)의 조사도 기원전 3세기 말까지 메카의 존재를 부정한다.
아라비아의 지리학에 관하여 기록한 다른 그리스 로마 저작자들의 저작물을 살펴봄으로 우리의 연구를 계속한다. 우리가 이러한 저작물을 실제로 연구한다면, 메카가 기원전 4세기 이후까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것들이 증명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중요한 그리스 역사가 데오프라스토스는 기원전 4세기에 살았다. 그는 사바(아라비아의 옛왕국)인들에 관하여, 그들의 상거래, 그들의 영토, 그들의 해상로에 관하여 기록하였다. 그는 그 지역에 관하여 자세하게 기록하였지만 메카는 절대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무슬림들은 고대역사에서 메카가 예멘과 함께 사바인의 상거래 중심지였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에 관하여 특히 상거래 연결점과 경로에 관하여 기술하는데 전문가였던 데오프라스토스가 메카를 언급하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의 조사
알렉산더 대제의 사후에, 아라비아의 지리와 역사에 관련된 많은 그리스 로마 저작자들과 역사가들이 나왔다. 이러한 역사가들과 지리학자들 대부분은 알렉산드리아의 도시에 살았고 알렉산드리아는 프톨레미인들(Ptolemies)의 수도였다. 세계 최초의 대학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설립되었고 알렉산드리아는 저명한 도서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으로 유명하다. 알렉산드리아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인물들 가운데 한 명이 유명한 지리학자 에라토스테네스이다. 그는 기원전 275-195년에 살았고 아라비아의 지리를 기록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에라토스테네스는 다양한 자료들에서 중요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우리는 기원전 3세기 동안 홍해 지역을 방문하여 기록한 많은 저자들을 안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이 피타고라스(Pythagoras)[xiv]인데 그는 프톨레미(Ptolemy) 2세, 바실리스(Basilis), 달리온(Dalion), 솔리(Soli)의 비온(Bion), 시모니데스(Simonides) 2세, 아리스토크레온(Aristocreon)와 필론(Philon) 치하에서 제독이었다. 그러한 책들은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이용할 수 있었다. 실제로 우리는 스트라보가 말한 것에서 에라토스테네스가 이러한 책들을 수집하였다는 것을 안다.[xv]
그는 알렉산더 대제가 보낸 탐험가들에게 얻은 자료 그리고 후계자 알렉산더 프톨레마익(Alexander Ptolemaic)에 의하여 시도되었던 지리학 탐험에서 얻은 자료를 조사하였다.[xvi] 이러한 그리스인 탐험은 기원전 3세기까지 계속되었다.[xvii]
기원전 278년 프톨레미 II세의 탐험들에서 정보는 홍해의 남부와 중부지역과 아프리카 해안을 포함한다. 그것들은 인도와 예멘에서 들어오는 향신료 경로를 통제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 정보는 코끼리 사냥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도 사용되었다. 코끼리는 시리아를 지배했던 그리스 왕가 셀레우시드(Seleucids)와 프톨레미(Ptolemies) 전쟁에서 사용되었다. 이러한 요소들은 홍해의 아프리카 해안과 아라비아 해안에 대한 지리적 데이터의 조직적 수집을 위한 문을 열었다. 이 지리학적 행위의 결과는 에라토스테네스의 책과 중요한 지도였다.[1]
에라토스테네스는 홍해의 길이를 측정하였다. 그는 또한 아라비아 남부와 아카바 또는 홍해상의 이스라엘 항구인 북부의 일랏(Ilat)을 연결하는 해상경로와 육지에 대한 완벽한 조사를 하였다. 그는 그 지역의 모든 사람들과 중심지들을 기술하였고 메카가 나중에 건설되었던 육지의 경로를 따라갔지만 그는 메카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스 로마 지리학자들은 메카가 나중에 건설된 지역을 "살 수 없는 곳"이라고 기술한다.
에라토스테네스가 기술한 것들 가운데 아라비아 지역이 있지만, 이것은 은자의 땅이라고 부르는 홍해를 따라 있는 아프리카 해안 지역과 일치한다.[xviii] 이 아프리카 지역은 우리의 연구에 중요한 지역인데 왜냐하면 그곳의 반대편 홍해의 아라비아 해안 위에 거대한 사막 지역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스 로마 지리학자들에 의하여 기술되었다. 이 아라비아 지역의 남부는 도시나 마을이 없는 건조한 지역이었다. 그곳은 야만적인 유목민들이 때때로 대상을 공격하며 돌아다니는 위험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그리스 로마 저작자들이 사람이 거주할 수 없는 곳으로 기술하는 지역으로 북부 아라비아와 남부 아라비아를 나누는 지역이다. 그곳은 육상경로에서 가장 두려운 경로였다. 기원전 3세기를 시작으로 그들은 이스라엘과 시리아와 상거래에서 그 육상경로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말하는 그 육상경로는 홍해를 인접하고 결국에는 메카가 건설될 지역을 통과하는 경로를 말한다. 그곳은 기독교 시대 이후까지도 여전히 가장 위험한 육상경로였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은자의 땅이라 불리는 아프라카 홍해 지역의 맞은 편 아라비아 지역을 언급하였다. 반면에 에라토스테네스를 이어서 수 세기에 걸쳐서 나온 지리학자들은 이 지역 인근의 어떤 지역을 기술하였다. 역사가 에라토스테네스는 이 지역에 근접하여 살았던 거주민들을 발견하거나 기술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에라토스테네스의 시대인 기원전 275-195년에 이곳 주변의 많은 지역에 사람이 거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곳들은 거대한 사막의 일부였다. 예멘에서 팔레스타인을 향하는 홍해 옆의 육상경로는 에라토스테네스의 시대에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우리는 그 육상경로를 따라서 서부 아라비아의 중부에 아직 마을이 건설되지 않았다는 것을 결론지을 수 있다.
에라토스테네스의 보고는 그의 시대를 기술할 뿐만 아니라 기원전 3세기 말에서 시작하여 기원전 4세기 말까지 기간동안 알렉산더 대제의 탐험가들로부터 시작하여 이전에 그 지역을 탐험하거나 방문하였던 많은 지리학자들을 기술한다. 메카가 에라토스테네스의 시대에 존재하였다면, 어떻게 그가 그것을 그 지역에 관한 그의 지도에 기술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것은 여행자들과 그들의 대상들을 위한 피난처가 되었을 것이고 홍해의 자랑이 되었을 것이다. 그에 의하여 또는 그 이전에 탐험하였던 사람들에 의하여 마을도 도시도 기술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마을이나 도시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메카가 당시에 존재하였다면 지리학자들과 그 사막의 건조하고 두려운 경로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휴식과 희망의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만약에 메카가 에라토스테네스의 시대에 존재하였다면 그것은 나중에 나온 지도들도 도시와 마을이 없는 것으로 기술한 지역인 서부 아라비아 중부의 건조한 지역에서 그의 지도를 위한 중요한 기준점이 되었을 것이다. 무슬림이 주장하듯이 메카가 모든 아라비아인들을 위한 순례의 도시였다면, 왜 에라토스테네스는 서부 아라비아 중부를 그의 기술과 그의 지도에서 메카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음으로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지역으로 기술하였는가?
그러나, 애석하게도 에라토스테네스와 같은 지리학자들은 결국 메카가 건설되었던 그 지역에서 기준지역으로 사용할 마을이나 도시를 어떤 것도 가지지 않았다. 그 건조한 사막 지역에 마을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무함마드가 주장하듯이 전 세계로부터 순례자들이 예배하기 위한 사원이 있을 수 없다. 그들의 예배를 위하여 필요한 사원을 요구하는 종교를 가진 또는 종교를 가지지 않은 부족이 그 지역에 없었다. 실상을 보면, 그 지리학자들의 보고서들은 메카의 카바가 그리스도 이후 수 세기에 걸쳐서 그 지역으로 이주하였던 부족들을 위한 이교도 사원이었다고 확인한다.
이 건조하고 사람이 살지 않는 사막에 역사적인 유일신 신앙이 수립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그리고 그리스도 시대 이후 수 세기 만에 사람들의 관심이 진리에서 아라비아 이교사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가.
이것이 기원전 4세기와 3세기 그 사막의 초창기 육상경로조차도 거의 시작도 되지 않았고 방치된 지역의 상황이라면, 육상경로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예멘 그 자체도 아브라함의 동시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사막의 이 지역이 족장 아브라함 시대의 유일신교의 중심지였다고 21세기에 결론짓는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누군가가 종교적 유산을 만드는 것을 돕기 위하여 역사를 통하여 생명을 보여주지 않았던 사막의 이 지역에 영원한 소망을 세우는 것은 영혼에 치명적이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부족은 기원후 5세기에 이 중요하지 않은 사막 지역에 살기 위하여 왔다. 예멘에서 이주해온 후에 그리고 무함마드가 자신이 알라의 예언자라고 주장한 후에도 그 사실은 그 사막의 그러한 상황에 관한 역사적 보고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우리의 무슬림 친구들은 역사에서 알려진 진정한 유일신교 유산으로 돌아올 필요가 있다. 그들은 성경적 관점을 배울 필요가 있는데 성경에서 세계의 진정한 구세주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 여러 차례 예언되어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의하여 그분과 그분의 구원을 찾도록 부름을 받은 믿을 만한 유일한 유산이다. 모든 세대에 걸쳐서 많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믿을 때 구원을 받았다.
기원전 750년에 예언하였던 이사야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하여 구약성경 53장 4절과 5절에서 말하였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 구절은 자신의 죄에서 용서받기 원하는 모든 사람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의로운 양을 바라보라는 초청이다. 예수는 이사야가 그다음 구절에서 예언하였듯이 그가 죽을 장소로 끌려가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이사야가 9장 6절에서 말하였듯이 전능하신 분이었으나 기꺼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라사,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그분은 그것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그 전능하신 하나님은 십자가로 갔는데 그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하여 기꺼이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의 대가를 치르었기 때문이다.
아가타르키데스(AGATHARCHIDES)의 아라비아 서부 측량
우리의 연구에 대한 믿을만한 자료로서 그의 측량의 정확성
우리의 연구에서 이제 우리는 기원전 2세기에 이르렀는데 의심할 여지 없이, 그 당시 가장 중요한 지리학자이며 역사가는 알렉산드리아의 아가타르키데스이며 그는 기원전 145년과 132년 사이에 저술하였다. 그는 그리스의 도시 Cnidus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기원전 2세기 말에 이집트 정치역사를 만드는데 중요한 인물로 여겨진다.[xix]
그는 프톨레미 왕궁에 아주 가까운 사람이었고 기원전 3세기와 2세기에 걸쳐 일어난 모든 원정대의 결과에 대하여, 특히 홍해, 아프리카 연안과 서부와 남부 아라비아 인근의 지역에 대하여 먼저 지식을 습득한 사람이었다. 그는 프톨레미인들의 업적을 기록한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기원전 3세기와 2세기 초반 동안 왕들의 사절들이 제시한 주요 보고서들이다.[xx] 아가타르키데스는 예리한 통합가와 분석가로서 모든 정보를 통합하였다. 그는 그 지역을 방문하였던 탐험가들의 이름들을 기록하였다. 그가 언급한 이름들 가운데 지리학자 아리스톤(Ariston)의 이름이 있었다. 그 지리학자는 프톨레미가 기원전 3세기에 아라비아를, 특히 메카가 나중에 건설되었던 홍해 인근의 서부 아라비아 지역을 탐험하라고 급파한 사람이다.[xxi]
아가타르키데스는 프톨레미 3세가 그 지역을 탐험하라고 보낸 심미아스(Simmias)와 같은 다른 탐험가들의 이름도 언급하였다. 아가타르키데스는 심미아스가 그 지역을 어떻게 기술하였는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중요한 자료가 되었는지 말하였다.[xxii]
아가타르키데스는 프톨레미가 보낸 다른 지리학자들이 쓴 책들도 연구하였다.[xxiii] 학자들은 그가 아낙시크라테스(Anaxicrates)의 남부와 서부 아라비아 항해에서 인용하여 지도를 그렸다고 생각한다.[xxiv] 내가 전에 언급하였듯이, 기원전 3세기 동안 홍해를 방문하여 홍해에 관하여 기록하였던 적어도 7명의 저자들을 우리는 안다. 그들은 피타고라스(Pythagoras),[xxv] 바실리스(Basilis), 달리온(Dalion), 솔리의 비온(Bion of Soli), 시모니데스 2세(Simonides the Younger), 아리스토크레온(Aristocreon), 필론(Philon)이다. 학자들은 아가타르키데스가 그들의 모든 기록들을 보았다고 인정한다. 아가타르키데스는 그의 시대 이전에 탐험가들과 지리학자들이 기록하였던 보고서들과 책들에서 정보를 모으고 통합하였다. 그는 자신이 “목격자”라고 부르는 만난 사람들에게도 의존하였다. 그들 가운데는 홍해를 둘러싼 지역을 방문하였던 상인들과 탐험가들로 왕의 사절들이 있었다.[2] 안타깝게도, 홍해에 관한 아가타르키데스의 조사서 원본은 사라졌지만 거의 모든 책이 세 명의 고전 작가들 스트라보(Strabo), 포티어스(Photius) 그리고 디오도러스 시큐러스(Diodorus Siculus)의 기록들에 남아있다. 아가타르키데스의 책 가장 중요한 요약 부분이 포티어스의 책 Bibliotheca[3]에 발견된다.
그가 조사한 것의 정확성은 학자들에 의하여 아주 많이 인정된다. 기원후 7세기와 8세기부터 원정과 발견은 그것들이 그가 기록한 것들과 완전히 일치하여 아가타르키데스가 기록한 것들의 정확성을 확인하였다. 홍해에 관한 그의 책 “Agatharchides of Cnidus”에서 버스테인(Burstein)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그들은 그것의 기본적인 정확성을 입증하여, 다시 한번, 태고시대부터 존재한 고대 북동아프리카와 서아라비아의 역사와 인간 지리 연구를 위한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로 학자들에 의해 인정받았다.”[xxvi]
학자들이 아가타르키데스의 정확성을 옹호하는 한 가지 예는 그가 해안과 합수하는 물을 기술하는 방식이다. 아가타르키데스는 남부 아라비아 사바 땅 맞은편 물의 색깔은 강물과 같이 백색이었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 현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실이다.[xxvii] 그의 기록의 가치와 정확성을 증명하는 또 다른 요소는 그 지역에 살았던 부족과 사람들에 대한 그의 기술과 나중의 보고에서 그 같은 사람들에 대한 기술 사이의 유사성이다.[xxviii] 아가타르키데스는 서아라비아의 홍해 연안의 다양한 지형들을 측정해 준다. 이것은 그의 기록이 그것과 연결된 아라비아 지역과 해안을 조사한 지리전문가들로부터 증언에 의거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한다.
프톨레미인들은 홍해에서 그들의 무역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리고 홍해에 연결된 지역에 살고 있는 부족들 또는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 알기 위하여 그 지역에 관한 정확한 연구를 원하였다. 그들은 또한 상인들이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 또는 야만인 부족들 또는 베두인들의 지역의 정확한 길이를 알기 원하였다. 이는 기원전 3세기와 2세기에 걸쳐 프톨레미인들이 홍해 무역의 움직임을 통제하기 시작했으며, 아라비아 내륙에서 들어오는 그러한 무역을 위협하는 해적 행위를 다루기 위해 장기간에 걸친 집중적이고 정확한 연구의 양과 질을 정당화하였다. 아가타르키데스의 책은 프톨레미인들에게 서아라비아 지역의 정확하고 상세한 지리적 정보를 제공하는데 그리스 지리학자들이 성취한 것을 반영하였다.
아가타르키데스는 나중에 메카가 건설될 지역을 지나는 모든 사원들과 경로들을 포함하여 홍해를 따른 입지들에 관하여 기록하였지만, 그는 메카도 메카의 사원도 언급하지 않았다.
서아라비아에 대한 그의 기술에서, 아가타르키데스는 기원전 3세기와 기원전 2세기 전반부에 홍해에 인접한 지역들에서 실존하였던 각 주민들을 언급한다. 그는 남부 요르단에 수도가 있었던 나바테아 사람들(Nabataeans)로 시작하여 북아라비아로 들어가고 그는 계속하여 각 주민, 도시, 항구, 사원, 산을 기술하여 예멘에 이른다. 우리가 아가타르키데스 기술에서 알게 되는 것이 여기에 있다: 그는 메카가 나중에 건설되는 지역을 통과하지만 그는 메카를 언급하지도 않았고 사원들이 그의 연구에서 중요한 문제였음에도 그는 그 지역에서 단 한 개의 사원도 언급하지 않았다. 시나이 북서쪽 해안의 포세이돈 사원의 기원을 알려주기 위해 멈춰선 그를 발견한다. 그는 누가 그것을 건설하였고 누구를 위하여 그것이 건설되었는지 말한다. 우리는 네게브 사막에 위치한 사원에 많은 관심을 주는 그도 발견하는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단단한 돌로 만들어진 고대 제단도 있고 글씨가 고풍스럽고 알아보기 힘든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 성소는 평생 신성한 임무에 종사하는 남녀가 보살핀다.[xxix]
아가타르키데스는 사원이 희박한 곳인 특히 시나이와 서부 아라비아에서 각 지역에 존재하고 있는 사원들에 관하여 알고자 하는 그리스의 경향을 정확하게 보고한다. 그리스인들은 각 사원의 기원을 알고자 하는 열정을 가졌다. 네게브의 사원에서, 그리스인들은 돌 제단에 새겨진 오래된 비문을 분석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들은 그 사원에서 섬긴 사제에 관한 자료도 기술하였다.
메카와 그것의 사원이 그 시대에 존재하였다면, 그것은 그리스인들에게 대단한 관심거리였을 것인데 왜냐하면 메카가 건설되는 위치가 그리스 탐험가들이 사용하였던 육상경로였기 때문이다. 무슬림들이 주장하는 대로, 그 당시에 메카와 그것의 카바 사원이 존재하였다면, 모든 그리스 지리학자들이 거기에서 정지하여 그것을 기술하였을 것이다. 누가 사원을 지었는지, 종교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언급했을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건조하며 사람이 살지 않았던 지역은 아브라함이나 이스마엘과 같은 수천 년 전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사람들을 위한 어떤 사원이나 종교적 전통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가타르키데스는 아카바만을 따라 사원을 기술한다.
아가타르키데스는 아카바만 지역에서 일랏(Ilat)에 인접한 다른 사원에 관하여 말한다. 그것은 “바트미조마네이스(Batmizomaneis)”라고 호칭되는 부족에 속하는 땅에 있다. 아가타르키데스는 자신의 말로 그 사원이 “모든 아랍인들에 의하여 높이 경배된다”고 강조한다.[xxx]
아가타르키데스의 사원이 사실상 메카의 사원이라고 많은 무슬림들이 주장한다. 그 사원의 정확한 위치를 정하기 위하여, 포티어스와 디오도러스에 의하여 보고된 대로 아가타르키데스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아가타르키데스는 아카바만 주변의 나바테아 사람들을 포함하여 이 사원의 북쪽 지역들을 기술하기 시작한다. 아카바만의 북부는 레안족 만(Laeanites Gulf)이라고 부른다. 포티어스와 디오도러스에서 아가타르키데스는 말한다:
소위 나바테안 아랍인들의 많은 마을이 있는 곳 주변에 레안족 만(Laeanites Gulf)을 만난다. 그것은 내륙으로 뻗어 나가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동물 무리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구를 가진 적지 않은 인접 국가와 많은 해안을 가지고 있다. 고대에 그들은 단지 삶을 영위하였고 그들의 가축에 의하여 공급되는 생계에 만족하였지만 나중에 알렉산드리아의 왕들이 상인들을 위하여 그 만을 항해가 가능하게 만든 후에, 그들은 난파된 사람들을 공격하였다. 그들은 또한 폰투스(Pontus) 강에 있는 타우리족(Tauri)의 잔인함과 무법함을 모방하여 해적선을 건조하고 선원들을 약탈했다. 그러나 그들은 나중에 4단(段) 노의 갤리선(galley) 콰드렘들(quadriremes)에게 바다에서 붙잡혀 타당한 처벌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아랍인들이 주변에 살았던 소위 레안족 만은 비디마니아인들(Bythemaneas)의 땅이다.
일랏(Ilat)의 만은 Alenites 또는 Aelaniticus로 호칭되었다. 아카바 만의 북부에 있는 레안족 만(The gulf of Laeanites)은 일랏 만으로 생각된다.
비디마니아인들의 땅은 나바테안 지역의 남부에 연결되며 나바테안 지역의 남부는 기원전 3세기에서 2세기 동안 아카바만의 북부까지 확장되는 것에 주목하라( see fig. 2). 아라비아에 관한 유명한 학자 무실(Musil)은 이 땅이 “소위 와디 알 에팔(Wadi al 'efal)[4]로서 아카바 만 동쪽의 길이 50Km, 폭 20Km의 저지대인 와디 알-압자즈(Wadi al- Abjaz)의 저지대“였다고 말하였다.[xxxi] 아가타르키데스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이 해안의 다음 부분에는 5백 스타디아(1 스타디아: 190m) 이상의 거리를 두고 내륙으로 뻗어 있는 만이 있다. 그 만 내부의 영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바트미조마네이스“라고 부르며 육상 동물 사냥꾼들이다.
에라토스테네스의 체계에 따르면, 스타디아는 영어 마일의 10분의 1과 같아서 비디마니아 사람들(Bythemaneas)의 땅 길이를 약 50마일로 만든다. 나바테아 사람들의 땅에 인접한 아카바 만 인근에 있는 것으로 그가 이전에 기술하였던 그 만을 말하면서 “그 만 내부의 영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바트미조마네이스라고 부르며”라는 그의 말에서 우리가 보듯이 그는 그
만 지역 안에 바트미조마네이스의 거주민들을 두고 있다. 나바테아 사람들의 영토는 기원전 3세기와 2세기 동안 페트라(Petra) 인근과 아카바 만 북부까지 아직 존재하였다. “바트미조마네이스”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아카바 만의 북부에 거주하였다는 것이 분명하다.
디오도러스의 이야기는 포티어스의 이야기와 유사한데 왜냐하면 둘 다 홍해에 관한(On the Erythraean Sea) 그의 다섯 번째 책에서 아가타르키데스의 기록을 복사하였기 때문이다. 디오도러스는 말한다:
그 만 옆에 나라에 거주하며 “바니조메네스(Banizomenes)”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육상 동물을 사냥하여 먹고 살았다. 모든 아랍인들에 의하여 높이 경배되는 아주 신성한 사원이 거기 있었다.
포티어스와 디오도러스 둘 다 나중에 메카가 건설되는 곳에서 아주 먼 거리에 있는 레안족 사람들(Laeanites)의 만 또는 아카바 만의 북부에 있는 일랏(Ilat) 옆에 Banizomenes (또는 Batmizomaneis)의 사람들을 두고 있다. 메카는 아라비아 중앙 서부에 있으며 예멘에서 아주 가깝다. 바니조메네스(Banizomenes)에 대한 언급에 이어서, 그 두 저자는 남부의 또 다른 지역 타무드(Thamud) 영토에 관하여 말한다. 그들은 “이것들을 넘어서면 타모우데니(Thamoudeni) 아랍인들의 영역이다”라는 말로 그것을 기술한다.[xxxiii] 타무드 부족은 아카바 만에 가까운 북부 아라비아에 거주하였다고 역사에서 알려졌으며 그들은 나중에 메카가 건설되는 지역을 향하여 남쪽에 절대로 오지 않았다. 따라서 디오도러스에 의하여 기술된 그 사원은 아카바 만 지역 내부의 타무드 지역과 페트라 사이에 있었다.
포티어스는 타무드 지역을 언급한 후에 타무드 남쪽의 다음 부분을 언급하였다.[xxxiv] 학자들은 이 부분을 라스 카라마(Ras karama; 북위25도 54분, 동경36도 39분)와 라스 아부 마드(Ras Abu Madd; 북위24도 50분, 동경37도 08분) 사이의 해안 지역으로 생각한다.[xxxv] 라스 아부 마드는 메카의 북쪽 약 450Km(280마일)에 있다. 이 정확한 연구는 디오도러스가 언급한 사원은 타무드 지역 북부 아카바 만 안에 있었으며 메카의 사원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see Fig.2)
논노서스(Nonnosus)[5]는 페트라에 가까운 그 동일한 지역의 그 동일한 사원에 관하여 말하는 듯하다. 이 사원은 아라비아 신들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 논노서스는 기록하였다:
포이니콘(Phoinikon)과 타우레안(Taurenian) 산맥 너머에 있는 사라센 사람들의 대부분은 어떤 신을 모시는지 모르겠고 일 년에 두 번 모이는 한 장소를 신성히 여긴다.[xxxvi]
사라센은 플리니(Pliny)에 의하여 Natural History, Book V, chapter 12에서 언급된 사람들이며 페트라에서 멀지 않은 아카바 만에 사는 사람들이다. 로마인들은 그들을 “사라세누스(Saracenus)”라고 불렀다. 그들은 페트라에 가까운 요르단 남부 에돔과 연결된 사막에 거주하였던 부족들이었다.[xxxvii] 프톨레미는 기원후 2세기에 아라비아 페트라에(Petraea)[6]의 일부로 “사라센”을 언급하였고 그것을 남부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사이의 시나이에 두었다. 이것은 기원후 2세기에 사라센이 시나이 주변 지역으로 퍼졌음을 의미한다. 많은 그리스 고전을 번역한 에피파니우스 스콜라스티커스(Epiphanius Scholasticus)는 6세기 중반에 편찬된 그의 기독교 역사에서 사라센을 아카바 만 동쪽이지만 아라비아의 로마 속주 너머에 위치시켰다.[xxxviii] 에피파니우스는 6세기에 사라센을 그들의 원래 고향인 아카바만의 동쪽에 국한되는 것으로 기술하였다.
논노서스가 말한 포이니콘 위치를 알기 위하여 우리는 포이니콘을 언급하였던 6세기(논노서스의 시대) 역사가들의 저작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 가운데 프로코피우스(Procopius)가 있다. 프로코피우스는 아보코라부스(Abochorabus)가 포이니콘의 오아시스를 비잔틴 황제 저스티니안(Justinian)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기록하였다. 아보코라부스는 아카바만 지역의 사라센을 다스리던 가사니드(Ghassanide) 지도자 아부 카립(Abu Karib)이었다. 아부 카립은 비잔틴 황제 치하의 빌라드 알 샴(Bilad al Sham; 남부 시리아)의 가사니드 왕 자블라(Jabla)의 아들이다. 자블라는 기원후 529년에 죽었다. 그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아래타스(Arethas)는 빌라드 알 샴에서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었고 아부 카립은 아카바만을 향한 지역을 통치하였다. 이르판 알 사히드(Irfan al Shahid)박사는 기록하였다: “우리는 비문에서 프로코피우스의 아보코라부스는 실제로 자블라의 아들이며 아래타스의 형제 아부 카립이라는 것을 안다.”[xxxix]
야자나무숲(Palm Groves)라는 이름으로 프로코피우스의 기록에도 기술되었던 포이니콘의 위치를 정하기 위하여, 우리는 프로코피우스의 다음 기록으로 돌아간다.
“팔레스타인 국경 바로 너머에 있는 이 해안은 옛부터 야자나무숲에 정착해 있던 사라센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 숲들은 내륙에 있고, 넓은 땅 위에 펼쳐져 있으며, 야자수 외에는 전혀 자라지 않는다. 아보코라부스(아부 카립)는 저스티니안 황제에게 야자나무숲 포이니콘을 선물하였다. 아보코라부스는 거기서 사라센 사람들의 통치자였으며 황제는 그를 팔레스타인 사라센인들의 지도자로 임명하였다. 그는 적은 말할 것도 없고 그가 통치하는 야만인들로부터도 약탈을 당하지 않도록 그 땅을 지켜서 아보코라부스는 항상 두려워해야 하는 사람이며 유난히 활기찬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명목상으로 황제는 야자나무숲을 소유하였지만, 그가 거기 나라의 어느 곳이라도 실제로 소유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땅은 거주하는 사람이 전혀 없었고 극도로 건조하였으며 열흘을 걸어야 할 정도의 거리에 있었고 게다가 야자수숲 자체는 전혀 가치가 없었으며 아보코라부스는 단지 선물의 형식으로 주었고 황제는 그 사실을 충분히 알고 그것을 받았다. 야자수숲은 그러한 것이었다.”[xl]
프로코피우스는 계속하여 말한다: “이 사람들에 인접하여 매드데니(Maddeni)가 있다.”[xli] 이 사람들은 미디안 사람들이며 그들의 고향은 아카바만 동쪽이었다. 이것은 야자나무숲 포이니콘의 사라센 사람들이 아카바만 동쪽의 미디안 사람들과 인접하여 살았다는 것을 확인한다.
알-납크(al-Nabk; Palmyra와 Damascus사이)에서 발견된 한 문서에서 아부 카립은 단성론자 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xlii] 나중에 아부 카립의 중요한 도시는 페트라 남동쪽 약 25킬로에 위치한 사다까(Sadaqa)였다. 왕의 두루마리라고 부르는 페트라 파피리 롤 83은 그가 그 지역의 어떤 시민들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는데 관련되었다고 보고한다.[xliii]
아부 카립이 황제 저스티니안에게 선물로 포이니콘을 선물한 후에 황제는 그를 팔레스타인 사라센 사람들의 지도자로 임명하였다.[xliv] 포이니콘은 팔레스타인 지방의 일부분이 되었고 비잔틴을 위하여 아부 카립이 통치하였다. 이 지방은 시나이와 네게브를 포함하였다. 그러나 이전에 아부 카립은 포이니콘의 사라센 사람들을 통치하였다.[xlv]
포이니콘의 위치로 두 개의 오아시스가 가장 자주 제안되는데 두맛 알-잔달(Dumat al-Jandal)과 타북(Tabuk)이다. 둘 다 비잔틴과 관계를 구축했다.
타북(Tabuk)으로 향하는 그의 작전에서, 무함마드는 타북의 사원에서 기도하였다.[xlvi] 이 사원은 헤자즈(Hejaz)와 아라비아의 다른 지역에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는 캐러반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카디쟈가 그의 첫 부인이 되기 전에 이 사원이 카디쟈의 캐러반을 시리아로 인도하는 무함마드에게 알려졌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당시는 그가 예언자라고 주장하기 전이었다. 그는 지나가다가 타북에 멈춰야 했다. 타북에 들어올 경우 그는 거기 사원에 갔다. (무슬림들은 그 사원을 모스크라고 부르곤 하였다.) 알 와끼디(al Waqidi)의 책 마그하지(Maghazi; 무함마드가 타북에 들어온 것에 관한 최초의 이야기)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그 사원 구역 앞에 한 돌을 두었다.
“알라의 사도가 타북에 왔을 때, 그는 타북 모스크 앞에 한 돌을 두었다,....그리고 ‘여기부터 알-샴(al- Sham)이다’라고 말하였다.[xlvii] 그는 자신의 타북 입성이 새로운 경계를 세웠다고 말하고 싶었다. 타북은 비잔틴 치하에서 알-샴(남부 시리아)을 통치하였던 가사니드 사람들의 것으로 알-샴의 일부분이었다. 무함마드는 그가 타북에 입성한 후에 가사니드 사람들의 경계는 그 돌 너머가 되고 그가 타북에 입성하여 도달한 모든 것은 그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실제로 타북은 비잔틴의 남쪽으로 가장 먼 곳이었다. 기원후 628-629년에 가사니드 사람들과 비잔틴 사람들은 타북을 탈환하였다.
그러므로, 논노서스가 말한 사원은 한 오아시스 안에 있었고 그가 말하기를 거기에서 사라센 사람들과 포이니콘 사람들이 예배하였다. 이상에서 우리는 사라센 사람들이 아카바만 동쪽 지역에 거주하였다는 것을 보았다. 포이니콘의 오아시스는 가사니드 사람들의 지배하에 있었고 가사니드 사람 아부 카립에게 통치하였고 아부 카립은 비잔틴 황제 저스티니안에게 그 오아시스를 선물로 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 오아시스가 메카와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왜냐하면 사라센 사람들은 메카에도 그 인근 지역에도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메카는 가사니드 또는 비잔틴의 영역인 적이 없다. 그러한 설명은 가사니드가 비잔틴을 위하여 통치한 아라비아의 최북단에 있는 오아시스에 적합하다. 타북이 가장 적합한 오아시스이며 그것의 사원은 논노서스가 기록하였던 사원이다.
우리는 프로코피우스에게서 “사라센 사람들은 항상 그들의 신에게 약 두 달을 바쳤고 그 기간 동안 그들은 다른 사람의 땅으로 들어가는 어떠한 일도 맡지 않았다."[xlviii]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들의 주된 사원에서 사라센 사람들의 예배는 그들의 캐러반과 시리아로 가는 길에 지나다가 예배하기 위하여 거기서 멈추곤 하였던 아라비아인들에게 흔적을 남겼다. 그래서 전쟁이 금지되는 하람(Haram) 월의 사상이 메카의 꾸라이시 부족을 포함하여 아라비아 많은 부족들이 준수하는 의식이 되었다.
우리는 그 사원의 예배에 관하여 논노서스가 이것을 말하였다는 것을 안다: “포이니콘(Phoinikon)과 타우레안(Taurenian) 산맥 너머에 있는 사라센 사람들의 대부분은 어떤 신을 모시는지 모르겠고 일 년에 두 번 모이는 한 장소를 신성히 여긴다.”[xlix]
크로네(Crone)는 타우레니안 산맥이 자발 타이(Jabal Tayyi)이며[l] 이것은 북아라비아 북부 나제드(Najed)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에 아카바만 동쪽에 위치한 이 사원은 그 지역의 동쪽에서 오는 예배자들의 주의를 끌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럴듯하지만 타우레니안 산맥은 알 토르(al Tor)산맥이고 이것은 홍해에 가까운 시나이의 남부에 위치한다. 우리는 사라센 사람들 일부가 거기에 살았다는 것을 안다. 이 지역은 황제 저스티니안이 아부 카립에게 할당한 지방의 일부였다.
디오도러스와 논노서스는 동일한 사원에 관하여 말하였다.
디오도러스는 “모든 아랍인들이 예배하였던” 아카바만 지역의 작은 부족 바니조메네스(Banizomenes)의 땅에서 한 사원을 언급하였다. 그리스인과 로마인이 요르단 건너 지역과 시나이를 포함하여 아라비아의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아랍인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모든 아랍인들이 그 사원을 존중하였다는 디오도러스의 말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논노서스가 디오도러스가 언급한 신전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고 추측하게 한다.
디오도러스는 그 사원이 아라비아 신들을 기리기 위하여 지어졌다고 기록하였다. 아라비아의 최북단 그리고 파생적인 부족의 영역에 위치하였지만 이 사원에 관한 그리스 역사가들과 지리학자들의 발언은 아주 중요하다. 어떤 시기에는 북부 아라비아(요르단 남부 경계)의 이 사원에서 다른 아라비아 부족들과 함께 예배하였던 부족들도 있었다. 분명히 그 사원의 위치는 아라비아 내륙에서 와서 페트라 인근의 아카바만 북부에 위치하였던 바니조메네스의 땅을 통과하였던 캐러반들 때문에 잘 알려졌었다. 우리는 위에서 무함마드와 그의 동료들이 타북에 들어갔을 때 예배하기 위하여 그 타북 사원에 어떻게 들어갔는지 보았다.
그리스인들은 그것이 어디에 있든지 관계없이 땅에서 특별히 중요하고 많은 사람들이 경배하는 사원을 구별하는데 아주 조심스러웠다.
그리스 역사가들과 지리학자들의 그러한 성향을 볼 때, 이슬람이 주장하듯이 모든 부족들로부터 예배자들을 끌어모으는 메카의 사원에 대하여 특별한 주장으로 사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가타르키데스는 그의 시대까지 존재하는 모든 사원들을 그러한 열정으로 추적하였음에도 그는 메카도 그것의 사원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메카와 그것이 사원이 그러한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분명한 증거다.
아가타르키데스는 기원전 3세기 지리학자들의 이야기와 기원전 2세기 전반부였던 그의 시대를 망라하였다. 남부 요르단 경계에 가까운 아카바만 인근의 그 사원은 고전 저자들이 기록한대로 모든 아라비아 부족들이 경배하였다는 사실을 오늘날 학자들은 인정한다.
아라비아의 자료들은 아라비아 북부의 한 사원으로 아라비아 부족들의 순례를 확증한다.
암루 빈 루히(Amru bin Luhy)의 말을 통해, 우리는 아라비아 북서부에서 부족들은 두 개의 중요한 장소로 하지(Hajj; 성지참배여행)를 갔다는 것을 안다. 루히의 말은 ”주님은 겨울을 엘랏(Ellat)과 함께 알 타이프(al Taif)에서, 여름을 알 우짜(al Uza)와 함께 보낸다“이다.[li] 이것은 그 지역에서 많은 부족들이 하지를 타이프로 갔고 거기에는 엘랏에게 바쳐진 카바(Kaabas; 신전)가 있었다. 부족들은 그 해 동안 다른 시기에는 알 우짜에게 바쳐진 다른 신전에 갔다.
오늘날 학자들은 무함마드의 부족인 꾸라이시족도 매년 사원에 경배하기 위하여 북쪽으로 여행하였다는 것을 믿는다. 꾸라이시족이 메카의 사원을 경시하고 북쪽으로 그들의 하지 여행을 갔다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 웰하우센(Wellhausen)은 “사람들이 메카를 비워두고 순례여행을 가서 흩어지곤 하였다”라는 알-칼비(al-Kalbi)의 말을 인용한다.[lii] 그들의 생각에서 또 다른 사원은 메카의 사원 카바보다 더 탁월하였다.
꾸란의 구절들은 메카의 시민들이 “먼 거리” 여행을 하였지만 나중에 꾸란은 그 관습을 중지시켰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무함마드도 그가 메카를 점령한 후에 사람들이 이 종교여행을 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꾸라이시족은 여름에 타이프로 가곤하였다. 이것은 타바리(Tabari)에 기록된 대로 이븐 압바스(Ibn Abbas)의 말로 증명된다.[liii] 그 다른 여행은 북쪽의 사원으로 가는 것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검토한 것과 함께 아가타르키데스의 조사는 메카와 그것의 사원이 기원전 3세기와 2세기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기원후 나중 세기에 그 사원이 결국 지어졌을 때에도, 그것은 제2차적인 중요성을 가진 지역 사원이어서 무함마드가 속한 부족도 중시하지 않았다. 무함마드의 부족은 아라비아의 최북단에 있는 사원으로 다른 아라비아 부족들과 함께 순례여행을 가곤 하였다.
메카의 사원이 아라비아를 위한 유일신 예배의 중심으로서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에 의하여 건설되었다는 이슬람의 주장을 믿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오늘날 무슬림들은 이 주장을 거부하고 성경이 기술하는 하나님 예배로, 역사에서 진정한 유일신교로 돌아올 필요가 있다. 그러한 성경적 계시는 모세가 성경의 처음 다섯 권의 책(모세오경)을 받은 이후 신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시대에 걸쳐서 기록되었다.
논노서스가 아카바만 지역에서 그것에 관하여 기록하였던 사원은 일부 아라비아 부족들에게 일 년에 두 번 하지의 중심이었다. 꾸라이시족은 일 년에 한 번 거기에 갔다.
아카바만 지역의 북부 아라비아에서 아가타르키데스가 언급한 이 사원을 논노서스가 입증한다. 이전에 우리가 포티어스의 책에서 그것들을 발견하듯이 나는 이 사원에 관한 논노서스의 말을 인용하였다:
포이니콘(Phoinikon)과 타우레안(Taurenian) 산맥 너머에 있는 사라센 사람들의 대부분은 어떤 신을 모시는지 모르겠고 일 년에 두 번 모이는 한 장소를 신성히 여긴다.
먼저 모이는 모임은 온전한 한 달간 유지되며 봄의 중간까지 간다. 나중의 모임은 두 달을 유지한다. 이러한 모임이 지속되는 동안, 그들은 서로간에 뿐만 아니라 그들의 국가에 사는 모든 사람들과도 완전한 평화 가운데 산다. 야생동물도 사람과 평화롭게 산다고 주장하는데 그들 자신들 가운데서는 말할 것도 없다.[liv]
이것은 북부의 사원이 많은 부족들이 일 년에 두 번 순례를 행하는 곳이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한다. 이 순례기간 동안, 부족들은 서로 싸우는 것을 절제하였다. 꾸라이시의 종교적 여행들 가운데 하나가 이 사원으로 가는 것이었다면, 무함마드가 이 유명하고 역사적인 아라비아 사원 순례를 중지시키려고 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메카의 부족 꾸라이시족과 다른 부족들이 대신에 메카로 순례를 행하라고 지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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