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대 그리스 로마 저술가들의 연구는 메카가 기원후 4세기 이전에 건설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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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노서스의 인용에서, 우리는 북부의 사원이 그들의 의식 그리고 우리가 메카의 사원 그리고 아라비아의 다른 사원에서 만나는 의식과 사이에 유사한 점을 가진다는 것을 안다. 이러한 의식들은 하지 그리고 하지 기간 동안 전쟁을 절제하는 것을 포함한다. 메카의 사원에서 행하여진 이러한 의식은 아라비아 이방 종교의 의식을 반영한다. 메카의 사원은 예멘의 힘야르족(Himyarite) 지도자 튜바(Tubb'a)에 의하여 기원후 5세기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많은 아라비아 부족들과 마찬가지로 꾸라이시 부족은 일 년에 두 번 순례 여행을 계속하였다. “하지(Hajj)”라는 단어는 순례를 의미한다. 학자들은 꾸라이시족이 타이프의 사원으로 그리고 아라비아 최북단에 위치한 사원으로 이러한 순례여행을 정기적으로 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무함마드가 모든 무슬림들에게 메카의 사원에서 예배를 강제하고 아라비아의 다른 사원에서 예배를 폐지하기 전 이러한 여행은 오랫동안 이행되었다.
그러므로, 그 당시의 지리학자들과 아가타르키데스의 정확성으로 우리는 그 당시에 메카의 사원도 메카라는 도시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대신에 다른 사원이 있었고 그것은 아라비아 부족들을 끌어들였다. 그 사원은 북부 아라비아와 요르단 사이 경계 인근에 있었다.
무함마드의 부족인 꾸라이시는 메카가 기원후 4세기경에 예멘에서 온 쿠자(Khuzaa'h)라는 다른 부족에 의하여 건설된 후에 메카를 점령하였다. 나중에 도시안에 메카의 사원이 건설된 후에도 꾸라이시족은 많은 아라비아 부족들의 관행을 계속하여서 일 년에 두 번 순례여행을 하였다.
꾸란 수라 꾸라이시 106장 1-3절은 두 여행을 위하여 부족이 그들의 “서약”을 하는 것을 금지한다. 그 꾸란 구절은 북부의 사원과 타이프의 사원으로 두 여행을 의미하며 대신에 그들이 메카의 사원에서 알라를 예배하도록 강제한다. 수라 꾸라이시 106장 1-3절은 말한다:
꾸라이시 족의 서약, 겨울과 여름의 여행에 적용되는 서약이다. 그들이 이 집의 주님을 경배하게 하라.
이슬람 전통은 꾸라이시족이 북부 아라비아 다른 곳으로 두 번의 종교적 순례 여행을 하는 관습이 있었다는 것을 확증한다. 학자들은 꾸라이시족이 아라비아 최북단에 위치한 사원과 타이프 사원으로 이러한 순례 여행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여행들은 무함마드가 모든 무슬림들에게 카바라고 부르는 메카의 사원에서 예배를 강요하기 전에 정기적으로 행하여졌다. 무함마드는 그것들 가운데 많은 것이 또한 카바라고 호칭되었던 아라비아의 다른 사원들에서 예배를 폐지하였다.
꾸란이 꾸라이시족에게 행하는 것을 금지하였던 두 여행은 상업적 또는 종교적 하지 여행이었는가?
꾸라이시족의 두 여행에 관한 꾸란의 꾸라이시 장을 해석할 때, 일부 무슬림들은 시리아로 가는 캐러반과 예멘으로 가는 캐러반의 두 개의 연례적인 상업 여행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 꾸란 구절은 꾸라이시족이 상업을 그만두고 메카를 순례하는 데 헌신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메카 상업의 실제 규모를 살펴보면 역사적 증거는 이 주장을 반박한다.
6세기 예멘의 상황은 메카가 서부 아라비아의 상거래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길을 예비하였다. 정치적 사건들은 힘야르족의 상업활동이 쇠퇴하고 메카가 상업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이러한 사건들 가운데 예멘에서 나지란(Nijran)기독교인들에 대한 힘야르족의 박해에 대응하여 기원후 525/526년에 예멘 힘야르족에 대한 에티오피아의 출정이 있었다. 기원후 575/577년에 마드 카브(Maad Karb; Saif bin Dhi Yazan로도 호칭됨) 3세 치하의 힘야르족은 예멘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찾았다. 이것은 힘야르족이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와 거래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았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지역들이 비잔틴 치하에 있었고 비잔틴은 에티오피아와 동맹이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기원후 577년에 페르시아의 예멘 점령이 있었고 이것은 힘야르의 지배를 종식시켰다. 따라서 예멘 사람들이 비잔틴이 통치하는 지역인 시리아, 가자, 이집트, 요르단 건너 지역과 같은 지역들과 거래하기 위하여 그들이 아시아와 페르시아만에서 가지고 온 물건들을 운송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메카는 예멘에서 정치적 상황의 악화 그리고 예멘이 헤자즈(Hejaz)에 대한 지배권을 잃음으르 이득을 보았다. 메카는 육상경로에서 중심적 집합장소로 떠올랐다. W.M. Watt와 같은 학자들은 메카가 기원후 6세기 초반에 시작하여 서부 아라비아에서 상업을 지배하였다고 주장한다.[lv]
메카는 서부 아라비아에서 부족들과 동맹을 형성하였고 그들이 캐러반을 해적행위로부터 보호하도록 대가를 지불하였다.[lvi] 꾸라이시 상인들은 남부 시리아와 가자까지 갔다. 가자는 유럽의 국가들 그리고 지중해의 다른 국가들과 거래하기 위하여 중요한 상업시장이었다. 꾸라이시 상인들은 예멘에서 향품, 향, 가죽제품, 특히 사치스런 물건들을 가져왔다.[lvii] 그들은 향신료를 포함하여 아시아에서 예멘으로 오는 다양한 물건들을 거래하였다.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올리브 오일 그리고 곡식과 같은 다양한 먹을거리를 가지고 시리아에서 상거래를 마치고 아라비아로 돌아왔다.
꾸라이시족은 이라크 히라(Hira)까지 가는 캐러반이 있었고,[lviii] (우리가 al Asfahani에게서 아는 바와 같이)그들은 에티오피아와 상업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lix]
꾸라이시족은 매년 시리아와 예멘으로 몇 차례 여행을 하였다. 꾸라이시 캐러반에 대한 무함마드의 기습으로부터, 우리는 꾸라이시족이 적어도 매달 한 차례 시리아로 여행하는 대규모 캐러반을 꾸렸으며 일부 캐러반은 낙타 2,500마리를 동반하는 규모였음을 안다. 무함마드는 여러차례 그러한 캐러반을 강탈하려 시도하였다. 예를 들면 그는 한 때 그의 사촌 함자 이븐압델 무타렙(Hamzeh bin Abdel Mutaleb)을 무슬림 30명과 함께 보내어서 시리아에서 메카로 돌아오고 있는 꾸라이시족 캐러반을 매복하여 공격하였다. 이때는 그가 메디나로 이주한 후 7번째 달이었다. 그는 한 달 후인 8번째 달에 시리아에서 돌아오고 있는 또 다른 꾸라이시족 캐러반을 강탈하기 위하여 60명의 무슬림과 함께 우베이다 빈 알 하리드(Ubeidah bin al Harith)를 보냈다. 그 캐러반은 아부 서피안(Abu Sifian)이 대장이었고 꾸라이시족 사람 200명이 동행하였다. 지난번 공격 한 달 후이며 그가 이주한 후 9번째 달에 시리아에서 돌아오고 있는 또 다른 캐러반을 강탈하기 위하여 무함마드는 일단의 무슬림들과 함께 사드 빈 아비 와까스(Saad bin Abi Waqqas)를 보냈다. 지난번 공격 세 달 후이며 이주 후 12번째 달에 무함마드는 직접 그의 동료들을 이끌고 메카와 메디나 사이 알 압와(al Abwa’)로 가서 시리아로 가는 메카의 캐러반을 강탈하였다. 두 달 후 부왓(Buwat)의 기습이라는 또 다른 공격에서 무함마드는 200명의 무슬림을 이끌고 시리아에서 돌아오는 낙타 2,500마리의 대규모 꾸라이시 캐러반을 강탈하였다. 이주 후 16번째 달에 그는 알-아시라(al-‘Ashirah)의 기습이라는 공격을 무슬림 150명과 함께하여 시리아로 향하는 꾸라이시 캐러반을 강탈하였다.
한 달 후에, 그는 압델라 빈 자흐시 알-아사디(Abdellah bin Jahsh Al-Asadi)의 지휘 아래 일단의 무슬림들을 보내어 예멘에서 메카로 돌아오고 있는 꾸라이시 캐러반을 강탈하였다. 메카로 물자를 나르는 꾸라이시 캐러반이 그들에게 가까이 지날 때, 무슬림들은 그 캐러반을 매복 공격하여 한 사람을 죽이고 두 사람을 포로로 잡고 캐러반을 강탈하였다.
이것들은 무함마드가 꾸라이시 캐러반을 강탈하기 위하여 시도하였던 공격들이다. 역사적 사실은 (단지 일 년에 두 번이 아니라)매달 꾸라이시족이 낙타가 1,500-2,500에 이르는 대규모 캐러반을 운용였다는 것이다. 메카의 부유한 주민 상당수가 그들의 돈을 투자하였고 이러한 캐러반을 통하여 사업을 하였다. 메카의 개인들 몇 명이 소유한 작은 규모의 캐러반도 많이 있었다. 꾸라이시족이 한 번은 시리아로 한 번은 예멘으로 일 년에 단지 두 번 여행을 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그러므로, 무함마드가 꾸란을 통하여 꾸라이시족이 두 번의 상업적 여행을 하는 것을 금지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무함마드는 꾸라이시족으로 하여금 그들의 두 가지 종교적 순례를 금지시키려 의도하였고 그것 중 하나는 태양신 엘랏을 경배하기 위하여 알 타이프로 가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아라비아 북부의 사원으로 가는 것인데 그것은 타북의 유명한 사원이었을 것이 확실하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타북은 과거에 포이니콘의 오아시스로 호칭되었고 거기는 아라비아 부족들이 경배하였던 유명한 사원이 있었다.
메카의 카바는 아라비아 별 숭배에 속하는 아라비아의 많은 카바 신전들을 포함하여 종교체계의 일부였다.
무함마드 시대 이전 참배에서, 카바(Kaabah)는 아라비아의 소위 “별 가문 종교(Family Star Religion)”의 모든 사원들에게 주어진 이름이었다. 메카의 카바도 예외가 아니었다. 각각의 카바는 메카의 사원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구조적인 디테일이 내부에 있는 기본 입방체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각 사원은 선물이 놓여지는 우물이 있었다. 또한 각 사원은 순례의식에 필요한 거룩한 물을 공급하는 우물을 가졌다. 메카의 경우에 이 우물을 잠잠이라고 부른다.
카바에서 중요한 요소는 검은 돌이며 경배에 중요한 요소이다. 이 돌들은 아라비아인들이 발견하여 숭배하는 운석들이다. 이러한 돌들 가운데 하나가 발견되는 곳마다 그 주변에 사원이 건축된다. 그래서 각각의 카바에는 별 가문을 대표하는 신으로 여겨지는 검은 돌이 하나씩 있다. 이러한 카바들 가운데 어느 곳이라도 방문하는 순례자는 우리가 메카의 의식에서 보는 동일한 많은 의식을 행한다. 예를 들면, 남자와 여자는 특별한 옷을 입고 검은 돌 주위를 돈다. 그 관습은 나체로 카바 신전을 빙빙 도는 것이었다. 하라(Halah)와 같은 집단은 여자를 포함하여 완전히 나체로 도는 것에 합류하였다.[lx]
카바들은 예멘에서 시작되어 북부로 전하여졌다. 그것들은 “별 가문(The Star Family)”에 받쳐졌다. 알라라는 이름은 타무디(Thamudi)의 달신 히랄(Hilal)에서 유래되었다. 카바는 북부에서 많은 예멘 부족의 이주와 함께 아라비아 전역에 퍼졌다. 쿠자 부족은 기원후 2세기에 예멘에서 나중에 메카가 건설되는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기원후 4세기에 그들은 메카의 도시를 건설하였다. 기원후 410-435년 예멘에서 그가 통치하는 동안 메카를 점령하였던 예멘의 지도자 아사드 아부 카브(Asa’d Abu Karb)는 예멘에 존재하는 사원들과 동일한 설계로 메카의 사원을 건설하였다.
그 카바는 태양신 엘랏 그리고 알라의 딸들인 마나트(Manat)와 알-우짜(al-'Uzza)를 경배하는데 바쳐졌다. 엘랏은 또한 알라의 부인이었다. 모든 카바는 아라비아 별 숭배에 바쳐졌다. 때때로 그것은 별 가문의 멤버 하나에게 특별하게 바쳐졌다. 예를 들면, 타이프의 카바는 알라의 부인 엘랏의 경배에 바쳐졌다.
다른 우상들이 나중에 메카에서 카바에 더하여졌는데 그것은 특별한 명성을 얻었다. 또 다른 예는 후불(Hubul)인데 학자들은 그것이 달을 나타낸다고 생각하였다. 두 개의 다른 중요한 우상은 이사프(Isaf)와 나에라(Naelah)였다. 진(Jinn;영마)을 위한 사제로서, 그것들은 카바 내부의 진을 위하여 중요한 쿠한(Kuhhan; 의미를 모름, 역자주)이었다. 그들이 죽은 후에 그들도 또한 숭배되었다. 이사프와 나에라는 무함마드 가문과 이 두 우상에게 바쳐진 우무라(Umrah; 이슬람교에서, 하지 기간 이외에 임의로 하는 순례)의 하지에서 모두에게 중요하다. 우리는 나중에 더 자세하게 그것들을 연구할 것이다.
아가타르키데스의 보고를 통하여, 메카가 결국 건축될 지역이 그의 시대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이제 아가타르키데스의 업적에 대한 우리의 토론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는 홍해를 따라 아라비아 지역을 자세하게 기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홍해의 전 아라비아 해안을 따라 살았던 모든 사람들을 확인하였다. 아가타르키데스는 홍해의 해안에서 내륙으로 100마일까지 지리를 기술하였다. 그는 해안에서 약 80마일에 위치한 페트라와 같은 도시들을 언급하였다. 이것은 기원전 3세기에 캐러반들이 홍해를 따라가는 그들의 육상 경로로서 사용하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그리스와 로마의 지리학자들은 홍해의 해안에서 내륙으로 약 100마일까지 깊숙이 그리고 길이로 시나이에서 예멘까지 확장하는 좁고 긴 땅에 아주 관심이 있었다. 이 좁고 긴 땅은 우리의 연구에 중요한데 왜냐하면 여기가 해안에서 약 40마일 거리로 나중에 메카가 건설될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장소들이 잘 기록되었지만, 메카는 이 좁고 긴 땅을 탐험하고 기록하였던 이 시대의 모든 그리스 그리고 로마 지리학자들의 설명에는 없다.
북서부 아라비아의 홍해에서 내륙으로 약150-200마일 지점에서 시작되는 또 다른 역사적인 땅이 있다. 기원전 9세기경 이 지역의 오아시스들 가운데 일부에 적은 수의 도시가 건설되었다. 맨 처음 건설된 도시들 가운데 드단(Dedan)과 게달(Qedar)이 있었다. 다른 도시들은 기원후 8세기에 오아시스 도시들과 예멘 사이에 무역로가 개발되었던 나중에 건설되었다. 이러한 도시들 가운데 야트립(Yathrib)과 카이바르(Khaybar)가 있었는데, 이 도시들은 히자즈(Hijaz)라고도 호칭되는 지역인 북서부 아라비아를 점령하였던 사람들과 왕들의 다양한 기록들에서 언급된다. 메카가 나중에 건설되었던 지역도 히자즈에 위치하였다. 메카는 이러한 다른 기록들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히자즈로 알려진 북서부 아라비아의 그 지역을 통치하였던 왕들 가운데 한 명이 바빌로니아 왕 나보니두스(Nabonidus)였다. 나보니두스는 10년(550-540 B.C.) 동안 그의 주민들을 북부 아라비아의 테이마(Teima)의 도시로 이주시켰다. “Verse Account of Nabonidus”라고 호칭되는 것에서 우리는 읽는다:
나보니두스는 테이마의 왕을 살해하였고 그의 백성들을 데려와서 거기에 바빌로니아 그의 궁궐과 같이 자기 궁궐을 지었다.[lxi]
나보니두스가 하란(Harran) 자신의 원래 도시에 남긴 비문에서 테이마에 그가 있는 동안 그가 그 당시의 히자즈의 도시들을 통치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것들 가운데 야트립(메디나)와 카이바르[lxii]가 있었지만 그는 메카를 언급하지 않았다(see Fig. 4). 메카가 그 당시에 존재하였다면, 메카는 그가 정복하지 않았던 히자즈의 유일한 도시였을 것이다. 강력한 바빌로니아 왕이 히자즈 땅 깊숙이 그리고 멀리 정복하여 야트립까지 이르고 메카를 남겨둔 것은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은 그가 메카를 언급하지 않았고 그 이유는 메카가 그가 통치하였던 시기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 시기는 기원전 6세기 중반이었다. 그러므로 메카는 앞에서 언급한 시대에 북부 아라비아 사건들의 역사적 그림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홍해를 접하며 좁고 긴 이 땅은 메카의 기원에 관한 또 다른 열쇠를 가진다. 그 땅은 그리스와 로마의 원정대에 의하여 역사적으로 입증되었다. 그것은 또 예멘에서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향하여 그곳을 횡단하는 무역을 통제하려 하였던 왕조들에 의하여 입증되었다. 이러한 왕조들 가운데 하나가 아라비아와 요르단경계에 위치하였던 나바테아(Nabataean)왕조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예멘의 정통왕조이다. 그들의 모든 기록들에서 메카는 고고학적 기록들에서 없다.
아가타르키데스의 조사는 메카가 후대에 건설되었던 홍해를 따라가는 이 좁고 긴 땅을 구체적으로 포함하였다. 그는 나바테아 사람들로 체계적으로 시작하였고 레안족만으로 호칭되는 물을 언급하였다.
이어서 아가타르키데스는 바트미조마네이스(Batmizomaneis)로 호칭되는 사람들이 거주하였던 땅에 관하여 우리에게 말한다:
그 해안의 이 부분 이후 다음은 500스타드(stades) 이상의 거리를 그 나라의 내륙으로 확장하는 만이다. 그 만 내부의 영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바트미조마네이스(Batmizomaneis)라고 부르고 그들은 육상동물 사냥꾼들이다.[lxiii] (“스타드”는 1/8마일이다)
Fig. 2는 바트미조마네이스의 땅이 있는 아카바만이 나바테아 남부와 타무드 북부에 위치한 것을 보여준다.
이 땅에서 아가타르키데스는 모든 아랍인들이 경외하는 사원, 내가 이제까지 이야기한 사원을 언급하였다. 이 사원은 메카의 사원이 아니며 지리학자들은 그 사원을 메카가 건설된 곳에서 약 700마일 거리의 페트라에 가까운 바트미조마네이스의 땅에 그 사원을 두었다. 아가타르키데스가 홍해를 따라 좁고 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각 집단을 기술하며 각자의 영역이 내륙으로 얼마나 멀리 확장되는지 분명하게 언급하는 것은 흥미롭다. 세심한 그리스 지리학자로서 그는 적어도 아라비아 내륙으로 100마일까지 지역을 언급하면서 그 좁고 긴 땅의 지리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홍해를 따라가는 땅을 기술한 후, 아가타르키데스는 타무드 지역으로 돌아서는데 이 지역은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그 땅 조각의 남부지역을 말한다. 그는 이 지역에 “타모운데니(Thamoundeni) 또는 타무드(Thamud)라고 호칭되는 아랍인들”이 거주한다고 말하는데 이 부족은 기원전 8세기에 처음 나타나서 기원후 5세기까지 있었다. 타무드인들의 존재는 앗수르인들의 기록에도 반영되어서 그들의 비문은 타무드인들이 홍해를 따라가는 좁고 긴 땅을 포함하여 북부 아라비아의 광대한 지역에 흩어졌다고 입증하였다. 아가타르키데스는 이 좁고 긴 땅에 관하여 타무드 해안의 길이, 그밖의 특별한 것들등 구체적으로 많은 것을 기술한다. 이것은 학자들이 오늘날의 홍해 지도와 일치하는 이 타무드 해안 다음에 오는 해안들을 확인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실제로 그가 기술하였던 해안이 아라비아 반도에서 다음의 현재 위치 사이의 해안으로 지리학자들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북위 25도 54분, 동경 36도 39분에 위치한 라스 카르카바(Ras Karkama)와 북위 24도 50분, 동경 37도 08분에 위치한 라스 아부 마드(Ras Abu Madd)[lxiv]. 라스 아부 마드는 메카에서 약450Km(280마일) 거리에 있다.
오늘날 라스 아부 마드로 확인되는 지역을 기술한 후, 아가타르키데스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지역을 통과하는 듯하다. 이전에 그는 각 지역의 거주민들을 기술하기 위하여 정지하곤 하였지만 지리학자들이 라스 아부 마드로 끝나는 지역으로 확인하였던 지역을 떠난 후 거주민에 관한 기술이 전혀 없다. 아가타르키데스 그리고 그가 의존하였던 다른 지리학자들이 사람이 거주하였던 지역을 기술하지 않는 것은 통상적인 것이 아니다. 한 지역의 거주민들에 관하여 말하지 않는 것은 그 지역에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우리로 하여금 결론을 내게 한다. 사람이 살지 않는 이 지역은 후대에 메카가 건설되는 그 땅과 일치한다. 이 사실은 다른 지리학적 사실들, 즉 오늘날 우리가 아라비아 지도에서 발견하는 두 도시 라스 카르카마와 라스 아부 마드 사이의 지역을 학자들이 인식함으로써 재확인된다. 그것은 또한 아가타르키데스의 기술에서 나오고, 그가 다음과 같은 말로 기술하는 지역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해안의 다음 부분은 길이와 너비가 무한하고 색이 검은 모래언덕이 두드러진다.
이곳은 학자들에 의하여 제다(Jeddah)와 알-샤리파(al-Sharifa) 산호초 사이 중간 검은 현무암 하라트 샤마(Harat Shama)로 확인된다.[lxv] 오늘날, 제다는 메카의 항구로 간주되는데 제다는 메카에서 약40마일 거리에 있다. 알-샤리파는 지리서에서 "알-리드(al-Lith)에서 북서쪽으로 바로 떨어진 해안과 평행한 매우 긴 만 입구이며, 길고 좁은 섬인 제지라트 끼시란(Jezirat Qishran)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고 기술된다.[lxvi] (Fig. 3.를 보라)
제다와 메카가 건설된 지역을 기술한 이후로, 아가타르키데스는 그의 시대에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지역으로서 남쪽으로 약 86마일 확장되는 또 다른 건조한 지역을 설명한다. 그의 설명에서 우리는 라스 아부 마드에서 시작하여 제다와 알-샤리파 산호초의 중간까지 가는 땅을 볼 수 있는데 이 땅은 아가타르키데스 시대에 사람이 거주하지 않았다. 이곳은 후대에 메카가 건설되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길이가 약 460마일로 판단된다. 메카는 기원후 4세기에 세워졌는데, 아라비아 북서부 (특히 타무드족의 일부가 홍해를 따라 살게 된 곳)를 아라비아 중서부와 아라비아 남부를 연결하는 다른 구역과 나누는 이 구역의 중간에 있다. 그것은 북서 아라비아와 남서부 사이의 거대한 건조한 지리적 장벽이었는데, 기원전 3세기에 그것에 관하여 기록하고 기원전 2세기 중반 그의 시대에 그것에 관하여 기록한 아가타르키데스 시대에는 거기에 사람들이 살지 않았다.
중부 아라비아 서부에 위치한 이 지역에 대한 아가타르키데스의 관찰은 역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홍해를 따라 아라비아 북쪽에 거주했던 부족들은 북서 아라비아로 그들의 지배권을 확장한 나바테아인들과 함께 주로 리얀족들(Lihyanites)과 타무드족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부족들 중 누구도 (나중에 메카 도시가 된)이 사람이 살지 않는 아라비아의 중서부 지역에 살았던 것으로 역사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알라스카 사람들이 아브라함이 얼어붙은 북쪽으로 가서 유일신교를 세우기 위해 신전을 지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무함마드가 아브라함이 중부 서아라비아의 홍해를 따라 있는 건조한 땅에, 북아라비아의 가장 인접한 부족조차도 거주하려 하지 않았던 지역에 신전을 지었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더 쉬울 것이라는 것이다. 남쪽 방향에서 그런 지역에 가장 가까운 부족과 국가는 아라비아 중부의 그런 지역에 거주한 적이 없었다. 누가 그런 건조한 지역에 캐러반 기지를 짓고 싶어하겠는가? 마이니족(Maini)은 이미 그들의 무역을 감독하고 그들의 캐러밴을 보호하기 위해 드단(Dedan)과 같은 다른 지역에 기지를 건설했다. 그러나 그들은 메카가 나중에 지어진 그 지역에 결코 기지를 건설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고대의 역사를 통하여 그곳이 건조하고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으로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아르테미도루스(ARTEMIDORUS)의 조사
아르테미도루스(Artemidorus)의 조사는 메카가 나중에 지어진 중서부 아라비아의 그 지역이 기원전 103년까지도 여전히 사람이 살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또 다른 그리스 지리학자이자 역사가인 에페소스의 아르테미도루스는 총 11권의 지리책을 썼다. 그는 기원전 103년경에 살았고 역사학자 스트라보에 의해 인용되었다. 아르테미도루스는 세계지리학에 대한 11권의 책에 아가타르키데스의 책에서 발췌한 방대한 내용을 포함했지만,[lxvii] 그는 또한 그의 시대와 그의 여행에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수집된 추가적인 정보를 포함했다.[lxviii] 결과적으로, 아가타르키데스뿐만 아니라 아르테미도루스도 홍해를 따라 있는 땅의 일부를 기술하였다. 아가타르키데스처럼, 아르테미도루스도 홍해 연안의 각 구역의 자연과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을 기술하였다.
그가 후에 메카가 지어진 같은 중서부 아라비아 지역에 왔을 때, 그는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기원전 103년 경에 이 지역은 여전히 사람이 살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그는 그 지역 근처의 사람이 살지 않는 섬들을 언급했다.[lxix] 그는 작은 항구를 찾기 위해 이 지역의 남쪽으로 훨씬 더 걸어가야 한다. 이 포구의 남쪽에는 소위 "데배(Debae)"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이 있었다. 그 지역을 여행하는 베두인들과 적의 수의 농부들이 있었지만, 그 지역에서는 도시가 보이지 않았다. 아르테미도루스는 "더 문명화된" 사람들을 찾기 위해 예멘 국경 근처까지 훨씬 더 남쪽으로 이동해야 했다.[lxx] 다시 말해서, 메카가 나중에 세워진 아라비아 중부의 지역은 기원전 103년 현재도 여전히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예멘과 미개한 베두인 부족만이 살고 있는 지역에 의해 나뉘어져 있었다.
로마인들이 서부와 남부 아라비아를 탐험하다.
서부와 남부 아라비아로의 로마 원정대는 중부 아라비아 지역에 지어진 마을들을 정확하게 묘사했지만, 메카라고 불리는 도시는 결코 언급되지 않았다.
우리의 역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기원전 30년에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그 후 로마인들은 홍해를 따라 있는 아라비아 지역, 특히 아라비아 홍해 연안에 있는 루체 코메(Leuce Kome; 오늘날 Haura’ الحوراء로 알려짐)라고 불리는 도시의 남쪽을 지배하기를 원했다. 거기서부터, 중부 서쪽 해안을 지나, 야만족 부족들이 해적 활동을 하고 해상 항해를 위협하는 장소들이 있었다. 로마인들은 또한 예멘을 통제하기를 원했고, 그 후에 인도에서 예멘을 통해 들어오는 향신료 무역을 원했다.
로마는 이집트 총독 갈루스(Gallus)의 군사작전을 신뢰했다. 그는 실패했지만, 그의 군사작전은 우리에게 더 역사적인 정확성을 제공한다. 갈루스는 1만 명의 로마 병사, 1천 명의 나바테아 병사, 그리고 그 지역의 다른 로마 동맹국들과 함께 홍해의 이집트 연안에서 출발했다. 나바테아인들은 그 당시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군인과 안내자로서 이번 탐험에서 로마인들을 돕겠다고 약속하였다. 나바테아인들은 홍해를 따라 있는 북부 아라비아의 일부가 나바테아 영역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안내자로서 이상적이었다. 유명한 지리학자이자 역사가인 스트라보는 이 탐험에 참여했고 그의 16번째 책에 이 탐험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이것은 그 탐험에 지리적 측면에서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며 그것은 아주 잘 기록된 탐험이지, 어떤 종류의 이야기도 아니다.
이 탐험은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 도시를 모르고 지나칠 가능성이 있는 여행자의 여행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리학자에게는 특별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이 좁고 긴 땅에서 로마 무역을 위협할 수도 있는 모든 마을과 도시를 통제하기 위한 군사 원정이었다. 로마인들은 매우 철저했고 도시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 원정대는 지리학자들이 홍해를 따라 탐험하였고, 내가 전에 적어도 해안에서 내륙으로 100마일 확장되는 것으로 정의한 그 좁고 긴 땅을 통과하였다. 로마인들은 중부 아라비아에서 시작된 계속되는 해적행위로 인해 모든 마을을 정복하고 싶어했다. 따라서, 이번 군사 원정에서 어떤 도시나 마을도 홀로 남겨지지 않았다.
탐험대는 "하얀 마을"을 의미하는 루체 코메에 도착했다. 이 마을은 원정 당시 나바테아 영토의 일부였다. 스트라보는 이 마을을 거쳐 페트라로 가는 육로 그리고 거기서부터 이집트와 시리아로 가는 육로가 번성했음을 증명했다. 이 마을은 오늘날 아라비아 지도에서 북위 25도 07분, 동경 37도 13분의 엘하우라(El Haura)에 위치해 있다.[lxxi] 루체 코메는 후에 메카가 지어진 곳에서 약 280마일 떨어져 있다. 이 마을의 남쪽에는 홍해를 따라 아라비아의 중서부 지역이 있는데, 우리는 이곳을 이전에 확인하였고 기원전 103년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제, 홍해를 따라 육로가 번성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기원전 103년 이후 몇 개의 마을이 세워졌고 이것을 갈루스가 점령하였다. 이 마을들은 이 중요한 탐험의 목격자였던 스트라보의 이야기에 언급되어 있다.
루체 코메 이후, 갈루스는 나바테아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을 통과하여 남쪽으로 나갔다. 스트라보는 다음과 같은 말로 지역의 특성을 설명한다.
갈루스는 그의 군대를 루체 코메에서 이동하여 낙타가 물을 운반해야 하는 지역을 통과하여 나갔다.
갈루스는 나바테아의 오보다스(Obodas) 왕에 의해 그의 친척인 아레타스(Aretas)에게 할당된 사막에 도착할 때까지 나갔다. 우리는 갈루스가 루체 코메로부터 약 1,100 그리스 스타디아(약 137마일)의 에그라(Egra) 마을을 향해 행진하고 있었다고 추정한다. 스트라보는 아레타스 치하의 이 지역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것은 거친 곡식의 일종인 제아(zea), 기름 대신 야자수 몇 그루와 버터만을 제공하였다.[lxxii]
이것은 남쪽에서 오는 캐러밴 경로의 기지가 거의 없는 황량한 땅을 묘사한 것이다. 이 기지들은 주로 이 지역을 통과하는 무역을 보호하고 통제하기 위한 나바테아 기지들이다.
그리고 나서 스트라보는 중서부 아라비아 출정의 다음 단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했다:
그 다음에 갈루스가 건너간 곳은 유목민 땅인데, 그 대부분은 정말로 사막이었고 아라레네(Ararene)라고 하는 곳이었으며 그는 느그라니(Negrani) 성에 도착하는데 오십일이 걸렸다.
그곳은 메카에서 남쪽으로 약 385마일, 홍해 연안에서 약 125마일 떨어진 예멘 국경에 있는 나지란(Najran)의 도시였다. 우리는 스트라보의 설명을 통해 탐험기간 동안 홍해를 따라 아라비아의 중부 서쪽 지역은 기원전 3세기에서 2세기 이후로 거의 변화가 없었다는 것을 이해한다. 이전의 지리학자들은 이 지역을 북쪽에는 사람이 살지 않고 남쪽에는 예멘 근처의 더 문명화된 사람들에게 도달할 때까지 베두인족이 거주한다고 기술하였다. 나바테아인들이 캐러밴 경로에 건설한 기지들 중 적어도 세 곳이 작은 마을이 되었고, 이것이 이번 탐험에서 언급되었다. 그 상황은 기원전 3세기와 2세기의 상황과 거의 비슷하다.
갈루스는 이 지역에서 오는 해적들로부터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이 지역을 정복하기를 원했다. 그의 계획은 이 위험한 지역에서 발견된 모든 도시들을 점령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나지란에 도착할 때까지 어떤 도시도 찾지 못했다. 이것은 메카가 그 당시에, 즉 기원전 23년경에 아직 건설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갈루스는 나지란, 그리고 나서 (예멘 영토 내에 있는) 아스카(Asca)를 점령하였다. 남쪽으로 가면서, 그는 아트룰라(Athrula)라고 불리는 도시를 점령했고, 그리고 나서 마르시아바(Marsiaba; 아마도 사바의 수도인 마립)를 향해 전진했다. 그는 6일 동안 그 도시를 공격하고 포위했지만, 물이 부족해서 그만 두었다. 그는 나지란의 아랍인과의 전쟁과 그 남쪽의 전투에서 단 7명의 병사만 잃었다. 그의 군대에서의 손실의 대부분은 물과 물자 부족, 그리고 질병으로 인한 것이었다.
로마 원정 당시 메카가 존재했다면, 휴식을 취하고 보급품을 보충할 도시가 필요했던 지친 군대에 의해 놓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갈루스의 군대의 어려움은 메카가 나중에 세워진 중앙 아라비아의 이 지역의 작은 마을들 사이에 존재했던 광대한 거리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많은 병사들이 물과 물자 부족으로 사망했다. 로마인들은 실라에우스(Syllaeus)가 가이드로서 그들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비난했는데 그 이유는 마을들과 도시들 사이의 길을 선택함에 있어서 그가 마땅히 가야할 길 보다 거리가 더 먼 길을 선택하였다고 로마인들이 비난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 지역에 존재하였던 모든 마을들을 통과하려는 계획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는데 그 원정대와 동시대 모든 사람들이 그 마을들과 도시들을 알고 있었고 거주민들이 입증하였기 때문이다. 즉, 각 마을이나 도시는 갈루스가 나지란과 예멘의 다른 도시로 가는 길에 방문해야 할 다음 도시나 마을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중부 서부 아라비아 전체를 정복하는 것이 탐험의 중요한 목표였기 때문에, 갈루스는 메카 같은 도시가 당시에 존재했다면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고려해야 할 점은 갈루스가 예멘의 도시 마르시아바를 점령하는 데 실패한 후, 그는 길잡이로써 실라에우스를 대체하고, 대신에 네그라네(Negrana)로 돌아간 다음 나바테아 마을 루체 코메로 돌아가기 위하여 원주민 전문가들에 의존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메카가 나중에 건설될 경로에 세워진 몇 안 되는 마을들을 지나 더 빨리 귀환했다. 스트라보는 그 마을들을 이름을 들어 언급하였지만 메카는 언급하지 않았다.[7] 결국 갈루스는 그 전쟁에서 철군하였다. 이 중앙 아라비아 지역에 세워진 마을들 사이의 거대한 거리는 11,000명 이상의 군대에 보급품 조달의 문제를 만들었다. 갈루스는 물과 보급품 부족으로 수 천 명의 병사를 잃었다.
로마의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는 그의 책 로마의 역사(The History of Rome)에서 원정대의 실패를 기술하였다. 다음은 그가 기록한 것이다:
처음에 아엘리우스 갈루스(Aelius Gallus)는 아무도 만나지 못하였으나, 그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전진한 것이 아니었는데 사막과 태양과 (어떤 특별한 성분을 가진)물이 모두 그의 부하들에게 큰 고통을 주어서, 군대의 많은 사람이 사망하였다.[lxxiii]
이것은 우리의 논쟁을 진전시킨다. 만약 메카가 도시로 존재했다면, 그것을 통제하는 것이 갈루스의 주요 목표였을 것이다. 역사학자들 가운데 내가 이전에 언급한 캐러밴 경로에 세워진 몇 개의 마을을 제외하고는 어떤 도시도 기술하지 않았다. 메카가 존재했다면, 그곳은 휴식을 취하고, 보급품을 보충하고, 사람이 나즈란과 다른 예멘 도시들을 향해 이 끔찍한 지역을 횡단할 준비를 하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을 것이다. 사막을 점령할 계획을 세운 그 누구도 그것의 주요 도시를 버리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막에는 메카 같은 도시가 존재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 탐험대가 고통과 보급품 문제를 겪었던 것이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메카가 아브라함 시대에 번성했던 도시였다는 이슬람교의 주장이 근거가 없고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 시대의 역사학자들의 모든 기록은 메카가 서기 4세기까지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아브라함 시대에는 더욱 확실히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이슬람이 이 핵심 주장에 대해 틀렸다면, 우리는 어떻게 다른 주장에서 이슬람교를 신뢰할 수 있을까?
메카는 스트라보의 역사적 여행과 저술에는 없었다.
역사학자 스트라보는 우리에게 메카라는 도시가 그리스도 시대에는 존재할 수 없었음을, 따라서 무슬림들이 주장하는 시기에는 더욱 더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우리는 메카가 아브라함 시대부터 존재했다는 이슬람의 주장을 계속해서 반박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기원전 64년에서 기원후 23년 사이에 살았던 그리스 지리학자 스트라보의 저작을 연구할 것이다. 그의 지리학적 연구에서, 스트라보는 그의 이전의 지리학자들에 의해 쓰여진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요약하고 그의 동시대인들이 쓴 글들을 보고했다. 그가 언급한 저자는 아르테미도루스, 에라토스테네스, 아가타르키데스이다.[lxxiv] 나는 이전에 이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였다.
아테노도로스(Athenodorus)는 스트라보의 여행 중 일부를 동행한 지리학자였다. 스트라보의 말에 따르면, 그는 "페트라인들(Petraneans)의 도시에 살았던 나의 철학자이자 동반자"였다.[lxxv] "Petraneans"에 의해 스트라보는 페트라라는 도시를 의미하고, 그는 아테노도로스의 도시와 정부에 대한 몇몇 글을 인용한다. 스트라보는 또한 우리에게 그의 일생동안 아라비아의 많은 지역에 대한 상세한 조사를 열정적이고 정확하게 제공한다. 그는 다른 그리스 역사학자, 철학자, 지리학자들과 함께 그 지역을 방문했고, 그 지역의 직접 연구와 그 지역에서 그와 동행한 사람들의 관찰에 의존하며 그 지역을 기술하였다. 내가 이전에 언급했듯이 스트라보는 지리학자이자 역사가로서 로마 원정에 갈루스와 동행하였다. 스트라보의 목적은 그가 다양한 출처로부터 수집한 그 지역에 대한 정보를 개인적으로 검증하는 것이었다. 그는 원정의 목표를 다음과 같은 말로 이야기하였다:
아라비아의 많은 특징들은 최근 로마인들이 아랍인들을 상대로 원정한 것에 의해 드러났는데, 그것은 지휘관이었던 아엘리우스 갈루스의 통치하에 나의 시대에 만들어졌다. 그는 아우구스투스 시저에 의해 부족들과 장소들을 탐험하기 위해 보내졌다.[lxxvi]
그래서 우리는 그 탐험의 목적 중 하나가 아라비아의 "부족과 장소"를 탐험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트라보는 서부 아라비아에 대한 아우구스투스 시저의 특별한 관심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저는 이집트와 인접한 미개인의 나라가 아라비아에 인접한 것을 보았고, 아랍인과 미개인을 구분하는 아라비아만도 극히 좁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아랍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거나 그들을 정복하려는 목적을 생각해냈다.[lxxvii]
여기서 우리는 로마인들의 주요 목표가 아라비아의 북부와 중부 지역의 평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곳은 홍해 연안과 그 주변 지역의 미개인들을 마주하고 있다. 여기는 나중에 메카가 건설되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기억할 것으로 이 지역의 통제는 그 땅에서 상거래의 보안에 중요하였고 그 상거래는 기독교 시대의 시작에 즈음하여 흥왕하기 시작하였다. 시저는 또한 홍해에 인접한 아라비아 지역에서 오는 해적 행위로부터 해양 항로를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스트라보의 업적은 아브라함 시대 이후 2000년이 넘도록 메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나의 주장에 중요하다. 비록 이 지역이 스트라보의 로마 원정 참여에 의해 완전히 기록되었지만, 메카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그의 조사는 다른 지리학자들에 의한 집중적인 연구를 인용하였지만, 메카는 이 모든 것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이슬람 전통에 따르면 아브라함 시대 이후로 메카에 살고 있어야 할 어떤 부족도 언급되지 않았고 그 지역에서 어떤 사원도 발견되지 않았다. 스트라보의 조사는 아라비아의 먼 북쪽에서 남쪽으로 예멘까지 홍해를 따라 있는 부족과 장소에 대하여 다른 지리학자들이 기술한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또한 중요하다.
왜 스트라보는 메카 또는 메카의 사원에 관하여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만약 지역 탐사에 관심이 훨씬 적은 관광객이 주요 도시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것을 사고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와 같은 대제국을 위한 조사를 의뢰받은 지리학자가 메카 같은 도시를 언급하지 않는다면, 그가 우연히 이 도시를 놓쳤을 가능성은 없다. 그것에 더하여 그 지역을 기술한 모든 지리학자들과 전문가들은 메카 같은 도시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고 여러분은 오직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메카는 스트라보가 자신이 보고서를 기록할 당시인 기원후 23년경에 존재하지 않았다.
“에리트레이아(ERYTHRAEAN; 홍해) 바다 항해지”
“에리트레이아(ERYTHRAEAN; 홍해) 바다 항해지”는 기원후 1세기에 메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다.
나는 스트라보뿐만 아니라 아르테미도로스, 에라토스테네스, 아가타르키데스를 언급했는데, 그들 중 누구도 그리스도 탄생하기 이전의 메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제 다른 정보원으로 여러분을 모시겠다. 이번에는 아라비아의 교역로와 지역에 관한 가장 믿을 만한 역사적 문서 중 하나로 여겨지는 책이다. 그 책은 기원후 58-62년에[lxxviii] 무명의 저자에 의하여 씌여진 에리트레이아(ERYTHRAEAN; 홍해) 바다 항해지이다. 그것은 중앙 아라비아와 반대편에 있는 베레니케(Berenice) 시의 한 주민에 의해 쓰여졌고, 베레니케 시는 후에 메카가 세워진 곳에서 200-220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그 책의 연대는 우리 연구에 중요하며, 많은 외부 증거들이 그 연대를 증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플리니(Pliny)는 항해지의 아이디어 중 일부를 그의 책 '자연사(Natural History)'에 베꼈다. 자연사는 서기 72-76년,[8] 사이에 만들어졌다. 그래서 항해지는 그 이전에 쓰여졌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항해지의 날짜를 결정하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저자가 57장에서 히팔로스(Hippalus)가 서기 47년경에 기록한 인도양의 몬순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히팔로스가 주기적인 기상변화를 알아차렸기 때문에, 그는 적절한 시기에 인도로 항해할 수 있었고, 따라서 인도로 가는 왕복 항해에 필요한 시간을 단축시켰다. 그의 발견은 인도와의 교역을 왕성하게 하였다.
항해지의 저자는 몬순의 발견을 언급하는데 그것은 이 책이 서기 47년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증명한다. 어떤 다른 증거들은 더 정확하게 이 책이 그보다 조금 늦게 심지어 서기 60-62년 사이에 만들어졌다고 판단한다.
항해지의 저자는 그리스 상인이었고, 아라비아 지역을 인도까지 여행한 것이 확실하다. 우리는 또한 그가 알렉산드리아의 보다 큰 도시가 아니라 루체 코메의 아라비아 항구 맞은 편 홍해의 베레니케(Berenice) 시에 살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어떻게 이것을 아는가? 그 이유로 저자는 일반적인 항해가 이집트 내륙의 콥토스(Coptos)에서 나일강을 따라 이집트 사막을 통과하는 것이라고 기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콥토스는 나중에 끼프트(Qift)로 알려졌다. 그것은 룩소르(Luxor)로부터 43킬로미터 떨어진 테베(Thebes)시 근처에 있다. 스트라보와 플리니우스 둘 다 이 항해를 기술하고 있지만, 에리트라이아 바다 항해지의 저자는 이 항해를 말하지 않았다. 이것이 일부 학자들로 하여금 저자가 베레니케에 살았다고 추정하게 만든다.
베레니케 시는 아라비아 항구인 루체 코메(Leuce Come)와 에그라(Egra)의 맞은편에 있는 홍해의 서쪽 해안에 있다. 우리는 에그라가 루세 코메에서 약 137마일 떨어져 있고 말라탄(Malathan) 마을에서는 단지 62마일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말라탄 마을은 후에 메카가 세워진 곳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데 그 이유는 저자가 후에 메카가 세워진 땅에서 그리 멀지 않은 홍해의 아프리카 해안에 살았기 때문이다. 후대에 메카가 세워진 아라비아의 중앙 지역에 매우 익숙했던 그는 그가 살았던 곳과 가까운 지역에 대해 썼고, 그의 책을 매우 중요한 문서로 만들었다. 우리는 또한 이 책이 단지 그 지역을 방문하거나 그의 생전에 조사를 한 사람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살고있는 지역 근처의 도시와 마을을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살았던 도시와 메카가 세워진 곳 사이의 거리는 200-250마일 사이다. 만약 그가 살던 시대에 메카가 존재했다면, 그의 메카에 대한 지식은, 파리의 한 주민이 로마시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확실히, 만약 그 도시가 실제로 그곳에 있었다면, 저자는 그 도시에 대하여 알았을 것이다. 항해지의 정확성은 많은 지리적, 역사적 증거에 의해 입증된다. 우리는 그 책에서 기술된 것이 플리니가 아라비아 해안을 묘사한 후기 책의 기술과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또한, 우리는 에리트라이아 바다 항해지에 의해 기술된 것과 일치하는 역사적 사실들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책의 저자는 19장에서 말리차스(Malichas)를 나바테아의 왕으로 언급했다. 유대 로마의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말쿠스(Malchus)라는 이름으로 이 왕을 한 곳 이상에서 언급하였다.[lxxix] 에리트라이아 바다 항해지의 저자는 엘레아주스(Eleazus)를 유향(Frankincense)의 나라 왕, 즉 하드라무오트(Hadramuot)의 칭호로 언급하였다.[lxxx] 그는 또한 차리바엘(Charibael)을 두 예멘 부족 힘야르(Himyarites)와 사바(Sabaeans)의 왕으로 언급한다.[lxxxi] 이 정보는 아라비아 남부에서 고고학자 글레이저(Glaser)에 의해 발견된 비문에 의해 사실로 입증되었다.[lxxii]
저자는 홍해 해안에서 먼 다른 많은 도시들을 언급하였다. 한가지 예가 콜로에(Coloe)인데, 이 도시는 아프리카 해안의 한 도시 아둘리스(Adulis)에서 “삼일 여행의 거리”라고 말하였다. [lxxxiii] 저자는 홍해에서 비슷한 거리에 있는 많은 다른 도시들을 언급했다. 따라서 홍해에서 불과 30-40마일 떨어진 메카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 것은 중대한 문제이다. 저자는 메카보다 두세 배 멀고 중요하지 않은 지역 도시들을 언급하였지만 메카는 여전히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것을 생각해보라. 에리트라이아 바다 항해지의 저자는 아라비아의 서쪽과 남쪽 지역인 홍해와 인도양에 인접한 지역을 기술하였다.
그는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왕, 부족장, 도시의 이름을 언급했지만 메카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보고서는 그가 아라비아 중심부와 마주하고 있는 베레니케시에 살고 있고, 후에 메카가 건설된 곳으로부터 약 200-220마일의 거리에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그의 책이 분명하게 보여주듯이 전문적인 상인과 지리학자로서 그가 홍해의 해안 지역들을 기술할 때 그의 고향에서 가까운 도시들을 몰랐다는 것은 그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 사실, 만약 그가 인도와 같이 먼 도시, 부족, 무역을 그렇게 정확하게 묘사하는데 성공했다면, 어떻게, 그가 그의 집에서 200-220마일 밖에 떨어지지 않은 메카와 같은 도시에 대해 무지할 수 있었을까? 그가 메카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고 그 이유는 그 당시에 메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플리니(PLINY)의 조사
플리니의 조사는 아라비아의 모든 도시들, 마을들, 부족들을 언급하며 아라비아의 모든 것을 조사하였으나 그는 메카를 언급하지도 않았고 이슬람 전통이 고대시대 이후로 메카에 거주하였다는 어떤 부족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전에, 우리는 시저 시대 동안 중요한 군사작전을 살펴보았다. 로마의 지리학자이자 역사가인 스트라보는 이 군사작전을 기록했지만, 메카에 대해서는 어디에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가 살았던 시기인 기원전 64-23년 동안 메카가 건설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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